본문 바로가기
소설

검은 비 연대기

by 내면치유 2025. 7. 8.
반응형

검은비 연대기



이 글은 픽션(픽션 : 상상으로 이루어낸 창작)입니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한 건.

공기는 여전히 맑아 보였지만, 알 수 없는 탁한 기운이 조금씩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었다.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다.
웃음 속에 빈틈이 있었고, 말 끝에 서늘함이 묻어났다.
도시의 공기는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나는 천상에 직접 묻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귀찮았다.


무엇보다도, 남의 일에 함부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괜히 나섰다가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천신들께 욕만 바가지로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웬만하면 모른 척하자’는 것이 내 철칙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사람들의 정신은 조금씩 무너지고, 감정은 날카롭게 변했다.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했다.
그것도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불길은 마치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뻗어나갔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불길은 방향을 바꾸고, 더 깊숙한 곳을 향해 기어갔다.

 

그 순간, 참아왔던 무언가가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이건 아니다.”

나는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숨이 고요해지고, 의식이 바깥으로 흘러나가자
불타는 산속에서 한 산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비통함과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지금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 표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천상의 허락을 받아 천서를 적고, 도법과 도술을 통해 비구름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구름이 흩어져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어둡고 무거운 구름들이 하나둘 모였다.
마침내 저녁 하늘이 짙게 내려앉았고, 비가 떨어졌다.

불길은 진정됐다.


그 순간, 산신의 몸에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한 것을 보았다.
진화된 산불의 한가운데, 구름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그 중심에… 검은 우산을 든 실루엣이 있었다.

사흘 뒤, 뉴스가 떠들썩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악마 구름’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단순한 구름이 아니었다.

밤이 깊자, 나는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구름의 기운을 따라가자, 음습한 숲 속, 검은 우산을 든 자가 있었다.

그의 존재는 주변의 빛을 삼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오랜만이군.”
목소리는 귀가 아닌, 영혼에 직접 파고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신’이라 불렀다.
과거 천계가 금기를 깨고 만든 ‘처형관’, 반역한 신들의 영혼을 말소시키는 자.
그러나 그는 임무에서 이탈했고, 인간계에서 스스로 심판자가 되었다.

“나는 천계의 개가 아니었다.


이제는 내 방식대로 세상을 정리할 뿐.”
그의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울부짖는 영혼이었다.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이번 일은 단순한 산불 진화나 구름의 수수께끼로 끝나지 않는다.
이건… 더 큰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천계 기록고(記錄庫)를 뒤졌다.
낡은 죽간 속에서 이름 없이 기록된 존재를 찾았다.
그는 ‘처형관’이라 불렸고, 반역한 신들의 영혼을 말소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수백 년 전, 임무에서 이탈한 뒤 인간계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의 행적을 따라간 곳마다 기이한 사건이 있었다.
사람이 이유 없이 폭주하거나, 평온하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공허한 껍데기가 된 것들.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진 영혼들.

나는 다시 명상에 들어 그의 기운을 찾았다.


그는 이번엔 폐허가 된 사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 막으려면 금기의 문을 열어야 할 거다.”
그의 말이 귓속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졌다.
“하지만 그 순간, 넌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

 

금기의 문—영혼의 힘을 육체의 한계를 넘어 끌어올리는 의식.
대가로, ‘자신의 기억’을 잃는다는 경고를 들었다.

나는 이 의식을 아는 단 한 사람, 오래전 함께 싸웠던 옛 동료를 찾았다.
그는 예전과 달랐다.


검은 비에 잠식당해, 절반은 사신의 부하로 변해 있었다.

“너까지… 왜.”
내 목소리에 그는 웃었다.
“기억해낼 수 있겠어? 네가 이미 잊어버린 그 이름을.”

검이 부딪쳤다.
빛과 그림자가 부서졌다.
그의 검끝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나를 죽이는 것이 그의 사명인 듯.

숨이 가빠왔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기억 일부를 대가로 금기의 문을 열었다.

전신을 타고 불꽃 같은 힘이 번졌다.
세계가 느리게 움직였다.


그 속에서 나는 한 번의 베기로 그를 무릎 꿇렸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사신이 나타나 그를 회수했다.

“대가를 치렀군. 이제 시작이다.”

며칠 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였다.


사신의 세력과 산신들의 연합군이 맞붙었다.
천우 신검의 빛이 폭풍처럼 회오리쳤지만, 그들의 힘은 강했다.

전투 중, 사신은 웃으며 속삭였다.
“너의 선택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

그 순간, 번개와 함께 수십 개의 그림자 창이 내리꽂혔다.


숨이 끊어질 듯한 찰나—

멀리서 천계의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악신들은 붙잡혀 천계로 끌려갔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나는 쓰러졌다.
몸은 멀쩡했지만, 기억 속에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누군가를 떠올리려 하면, 머릿속이 허공처럼 비어버렸다.

그 공백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신과의 전투가 끝난 지 한 달.
검은 비는 멎었고, 도시는 다시 일상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다시 웃었고, 거리에는 노랫소리가 흘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진짜 평온이 아니다.

거울 속의 내 눈동자가 가끔 다른 색으로 번쩍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 중 몇은 그림자가 없었다.
밤이면, 모르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는 언제나, 내가 기억해야 할 듯한 한 여인의 뒷모습이 있었다.

산신들과 남은 신들이 모였다.
우리는 사신의 잔여 세력과 검은 비 피해자들의 영혼을 수습하려 했다.

그런데… 수백 개의 영혼이 사라졌다.


천계의 기록에도 없는 공백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곳… ‘제4의 경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이름이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제4의 경계—인간계, 천계, 지하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금지된 차원.
그곳은 모든 차원의 그림자가 모이는 곳이라 했다.

그날 밤, 나는 습격을 받았다.


그들은 그림자였지만, 형체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칼을 휘둘러도 갈라지지 않았고, 맞아도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짧은 전투 끝, 한 그림자가 마지막 숨처럼 속삭였다.
“우리는 그분의 그림자일 뿐… 사신은… 그분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날 이후, 꿈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진짜 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나를 베었는지조차, 너는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나는 깨달았다.


내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됐다는 것을.

모든 실마리가 제4의 경계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금기의 의식을 다시 준비했다.


이번에는 영혼을 찢어서라도 문을 열 작정이었다.

버려진 사찰 앞에 섰을 때, 공기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문살 사이로, 뒤집힌 하늘과 거꾸로 매달린 산맥이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한 발을 내디뎠다.
차원이 찢어지며 수천 개의 속삭임이 귀를 파고들었다.

 

경계의 규칙은 세 가지였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말 것.
그림자를 잃지 말 것.
돌아가려면 기억을 대가로 지불할 것.

멀리서 사람 형체가 다가왔다.


그는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곧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 순간 그의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형체 없는 속삭임으로 변해, 어둠 속에 흩어졌다.

경계의 중심에서, 모든 그림자가 모여 형체를 이루었다.


그 안에서 두 개의 눈이 번쩍였다.

“나는 기록자(記錄者).”
그는 내 기억을 지운 자였다.
사신을 만든 자이자, 모든 차원의 사건을 기록하고 필요하면 수정하는 존재.

“너는 너무 강해졌다. 균형을 위해, 너의 일부를 지웠다.”

그는 제안했다.“영혼을 완전히 해방시키고 돌아가고 싶다면, 남은 기억 절반을 내놔라.
거절하면, 넌 이곳에서 네 그림자가 될 뿐이다.”

그 순간, 잃어버린 연인의 얼굴이 스쳤다.
아직도… 그녀가 살아 있을 수도 있었다.

“거래는 필요 없다.”
나는 검을 뽑았다.

그림자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름과 그림자가 무기이자 약점이었다.
나는 규칙을 일부러 깨뜨렸다.


내 그림자를 버리고, 그것을 검으로 변환했다.

마침내 기록자의 형체를 찔렀다.
그가 부서지듯 흩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연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다른 기억들이 사라져 있었다.


누구를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공허.

벽에는 낯선 필체로 쓰인 문장이 있었다.
“기록은 끝나지 않았다.”

제4의 경계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
나는 연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반(半)영혼 상태였다.

 

그 사이, 인간계와 천계 곳곳에서 그림자 폭주 현상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어떤 그림자는 주인에게서 떨어져 사라졌다.

“나는 예전에 기록자를 봉인했어.
그 대가로 이름을 버렸고, 존재가 희미해졌지.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야.”

“기록자를 없앨 수 있어. 하지만 그러면 모든 균형이 무너질 거야.”

회의장에서는 자유와 균형을 두고 신들이 서로 맞섰다.


나는 침묵했다.

그날 밤, 기록자의 반격이 시작됐다.
거대한 그림자 폭풍 속에서 나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속삭였다.
“너는 원래 우리 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기록자와 맞서려면 ‘균형의 핵’으로 가야 해.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면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거야. 기록자이거나… 너.”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쥐었다.
“이번엔 도망가지 않겠다.”

균형의 핵은 혼돈 그 자체였다.


기록자는 거대한 형체로 나타나 말했다.
“나를 대신해 이 자리에 서라. 그러면 너의 사랑도, 세상도 지킬 수 있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나는 검을 뽑았다.
“내 선택은 내가 한다.”

전투가 시작됐다.
기록자는 내 과거와 후회를 무기 삼아 몰아쳤다.
나는 그림자를 버리고 검으로 변환해, 내 이름을 선언했다.

그녀가 앞으로 나섰다.


“마지막 힘을 줄게.”
그녀의 반영혼이 내 손 위에 겹쳐졌다.
그 순간, 그녀의 빛이 사라져갔다.

나는 그 힘으로 기록자를 찔렀다.
그의 형체가 부서졌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를 소멸시켜 자유를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균형을 지킬 것인가.

그녀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얗게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현실 세계에 있었다.
검은 비는 내리지 않았다.


거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먼 골목 끝, 제4의 경계로 이어지는 발자국이 있었다.
벽에는 낯선 필체로 쓰인 문장이 있었다.

“기록의 마지막 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