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은 묶을 수 없다. 묶을수록 칼날이 된다.” 도심의 ‘그림자 사람들’을 지나온 뒤, 민우에게 작은 섬에서 편지가 왔다. ‘바람의 섬’이라 불리는 곳. 사흘 뒤면 태풍이 정면으로 상륙한다는 예보와 함께, 오래된 등대지기 가족이 전한 한 문장.
—제발 와 주십시오. 해안제방의 봉인 항아리가 스스로 흔들립니다. 민우가 도착했을 때, 섬은 늘 불던 바람이 아니라 칼날 바람을 품고 있었다. 해벽을 따라 줄지어 놓인 크고 작은 항아리들, 입구에는 누렇게 바랜 부적이 붙어 있었다.
어딘가는 금이 갔고, 어딘가는 소금기와 모래에 문양이 벗겨졌다. 등대 아래 마당에서, 흰 머리의 노파가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나는 사람들한테 바람할미라 불렸지. 젊을 적 큰굿을 하던 자들이 이 항아리에 ‘사고로 죽은 이들’을 봉인했어.
바다가 사람을 삼키면, 도로 사람으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겁났던 거지. 그래서 묶어 둔 거야.” 노파의 손등에는 굵은 소금자국이 박혀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묶인 것은 더 성났다. 바람이 불수록 칼이 됐고, 태풍이 올수록 더 깨어나려 하지.”
해변의 모래 속, 항아리 밑은 동그랗게 파여 공허했다. 민우는 귀를 대었다. 항아리마다 서로 다른 숨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훌쩍이는 소리, 떠밀리다 끊어진 외마디, 꾹 참다 새어 나오는 사죄의 소리… 살아 있을 때 관심받지 못했던 목소리들이 소금기와 어둠 속에서 엉켜 있었다.
“봉인은 해결이 아닙니다. 단지 늦춤일 뿐.” 민우가 낮게 말했다. 밤이 내리자, 바람은 태풍의 앞잡이가 되어 섬을 휘감았다. 해벽을 때리는 파도마다 항아리의 입이 윙— 하고 울었고, 그 울림이 빗금처럼 섬 위를 베었다. 민우는 등대 옆 마루에 앉아 천우의 검을 놓고, 먼저 허락을 구했다.
“오늘의 베임은 묶인 것을 풀기 위한 베임이어야 합니다.” 그는 손을 모아 광명진언을 올렸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
진언의 떨림이 항아리들 사이로 스며들자, 검은 입김이 실처럼 뽑혀 나왔다. 허공의 어둠이 매듭을 만들며 서로 엉겼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날을 세우지 않고 칼등으로 허공의 매듭을 하나씩 쓸어 내렸다. 매듭이 풀릴 때마다 항아리의 떨림이 잠깐 누그러졌다.
바람할미가 등대 안으로 들어가 북과 방울, 벼락무 줄(오색동아줄)을 들고 나왔다. 마당에 재를 뿌려 원을 그리고, 동쪽을 향해 장단을 올렸다. “이 바람, 묶지 말고 길을 내자— 이 한(恨), 가두지 말고 나가게 하자—.” 그때였다. 첫 번째 항아리가 폭발했다.
소금에 눌어붙은 부적이 찢기며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물비늘 같은 바람에 손과 발, 울음과 쉰 호흡이 겹겹이 얽혀 거대한 팔을 만들었다. 모래밭에 뿌려 둔 재가 휩쓸리며 원이 깨졌다.
“잡아라—!” 검은 팔이 뻗어 민우의 발목을 잡아 바다 쪽으로 질질 끌었다. 발목에 얼음 같은 통증이 박혔다. 민우는 칼을 뽑아 휘둘렀지만, 베어내는 순간 기운이 두 갈래로 증식했다. 바람이 잘린 자리에 또 다른 바람이 피어올랐다.
“베지 마! 베면 늘어난다!” 바람할미가 벼락무 줄을 던져 기운을 감쌌다. 칠색의 줄이 검은 팔을 한 번 휘감는 순간, 무수한 낮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려 달라 했잖아. —우릴 묶지 말라 했잖아. —누구든 한 번만 들어 달라 했잖아.
두 번째, 세 번째 항아리가 잇달아 깨지며 검은 회오리가 등대 꼭대기에서 솟았다. 비늘 같은 바람, 두 갈래 혀 같은 돌풍—오래 묶인 한이 하나의 형상으로 합쳐졌다. 바람할미의 방울이 미친 듯이 울리고, 북가죽이 찢어질 듯 떨렸다.
민우는 칼끝으로 허공에 ‘風’의 획을 그려 바람길을 냈다. 바람이 빠져나갈 문을 먼저 여는 수. 그러나 회오리는 문을 타고 오히려 등대의 불빛을 삼키려 들었다. 유리창이 삐걱, 하얀 금을 그으며 흔들렸다.
“지금이야!” 바람할미가 부적 7장을 네 귀(四隅+천지)에 박아 등대 불을 지켰다.
참고 :부적 7장을 네 귀(四隅)+천지에 박는다 것은 사방(네 모서리 4) + 천(天, 천장/위) + 지(地, 바닥/아래) + 중(中, 중심/주인 자리 또는 출입문 1)= 총 7곳에 부적을 붙여 공간 전체에 결계(보호막)를 치고 액(厄)을 막는다는 뜻입니다.
민우는 그 틈에 지장보살 본심진언을 항아리 덮개마다 얹듯 띄웠다.
“옴 카카카 비산마예 사바하— 옴 카카카 비산마예 사바하—”
그러나 네 번째 항아리가 터지며,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배의 금속 울림, 갱도에서 끊어지는 리벳 소리, 붕괴 직전의 산의 비명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항아리 속 영혼들의 분노가 폭발하듯 일제히 민우와 바람할미를 덮쳤다.
모래가 칼날처럼 날아들고, 해벽의 소금기러기가 날개를 찍어내렸다. 검은 줄기가 민우의 팔을 묶어 칼을 떨어뜨리게 했다. 바람할미는 몸으로 민우를 밀쳐 내며, 등대 문설주에 자신의 등을 박아 회오리를 받아냈다.
“내가 묶었으니— 내가 먼저 맞아야지!” 등대 문틀이 쾅— 하고 갈라졌다. 바람할미의 손등에서 피와 소금이 섞여 흘렀다. 그녀는 피 묻은 손으로 다시 방울을 쥐고 굿 청을 올렸다. “얘들아, 내가 잘못했다.
묶어 둔 죄, 오늘 내 등이 갚는다. 그러니— 칼이 아니라 길을 따라가거라!” 민우가 입술을 깨물어 피를 묻힌 채 수인을 맺었다. 피 한 방울이 칼등에 스미자, 천우의 검이 낮게 떨었다. 그는 베지 않고, 칼등으로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매듭 하나를 풀 때마다, 항아리 하나의 울음이 반 뼘 줄었다. 그러나 분노의 덩어리는 마지막 항아리 군에서 터져 나와 민우의 목을 감았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도 보이지 않았고 죽어서도 막혀 있었다. 이젠 너로 길을 낼 것이다.
목이 죄어 숨이 막히자, 민우의 눈앞이 하얘졌다. 발끝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릴 때, 등대 안쪽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켜졌다. 바람할미가 등잔불을 항아리 사이사이로 옮기고 있었다. 등잔의 불꽃이 바람길의 이정표처럼 한 줄로 이어졌다.
민우는 마지막 힘으로 부동명왕진언을 토했다.
“나모 사만따 바즈라남 찬다 마하로사나 스포따야 훔 트랏 함 맘—!”
천우의 검에서 파란 번개가 비스듬히 뻗어 나가 회오리의 심장만을 살짝 건드렸다. 베지 않고, 방향만 틀었다. 분노의 물기둥이 등잔불의 길을 따라 고요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람할미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등잔을 들었다.
“이젠 돌아가거라. 묶여 있던 이름들아.”
등잔 사이로, 항아리의 봉인이 스스로 풀렸다. 쩍— 소금에 굳은 부적이 바람에 떨어지고, 달빛 같은 기운이 항아리 속에서 물새처럼 솟아올랐다. 아이의 웃음, 거친 숨, 미처 다 건네지 못한 ‘다녀올게요’ 한 마디가 바람에 실려 등대를 한 바퀴 돌았다.
그 순간, 가장 검은 매듭 하나가 등불 앞에서 떨었다. 폭풍의 심지, 원한의 핵이었다. 민우가 손을 내밀자, 매듭이 손끝을 물었다. 날선 통증이 뼛속까지 스몄다. “나는 너를 봉인하지 않겠다. 다만 길을 비추겠다.” 민우는 칼등으로 마지막 매듭을 풀어 주었다.
울음 같던 바람은 바다 쪽으로 돌아서 먼 데로 흘러갔다. 등대 유리창이 은빛으로 가벼워졌다. 섬의 바람은 다시 숨이 되었고, 태풍의 눈은 섬을 비켜 스쳐 지나갔다. 새벽, 민우와 바람할미는 모래밭에 남은 빈 항아리들을 흙으로 덮었다.
깨진 조각을 주워 한데 모아 작은 무덤처럼 쌓았다. 바람할미가 말했다. “묶은 자는, 시간이 지나 다시 풀어 주러 와야 했어. 그게 책임이지.” 민우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우리가 한 일은 돌려보낸 일입니다. 누군가가 삶으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봉인은 해결이 아닙니다.”
그가 섬을 떠나려던 순간, 주머니 속 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는 없었다. 마이크 너머, 오래 눌린 숨이 흘렀다. “…선생님, 갱도에서… 아직도 남편의 발소리가 들립니다.”민우는 바다 바람을 마지막으로 들이마셨다.
바람의 매듭을 풀어 길로 보냈듯, 이제는 땅속의 숨을 들어야 할 차례였다. 그는 등대 불을 끄고, 첫 배가 떠나는 방파제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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