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도심 한복판, 그림자 사람들 “도시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괴물과 마주친다.”

등장인물
무상인(악귀) - 살아 있을 때조차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응어리가 모여 탄생한 형상. 분노와 무관심, 착취의 흔적이 뒤엉켜 있다.
박도인 -전직 퇴마사. 개발과 권력의 ‘청부 퇴마’에 이용된 뒤, 인간의 그늘을 직시하게 된 인물.
악신과의 격전이 끝난 뒤, 민우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해연이 전해 준 다음 목적지는 밤의 도심, 철거가 멈춘 채 방치된 폐건물의 옥상이었다. 사람으로 넘치는 곳이면서도 누구나 외로운 곳—낮보다 더 깊은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는 며칠째 같은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무수한 이들이 그를 쫓아왔고, 끝에는 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표정도, 감정도 지워진 회색의 형상.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절규 같은 문장.
“왜 우리는 돈 없고 배고픔에 굶주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데, 겨우 우리가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것을 너희들이 빼앗아 갔어… 죽여버릴 거야.”
이곳은 한때 노숙인과 철거민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다. 공공과 자본의 이름으로 밤마다 천막이 찢겼고, 누군가는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도시는 그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기억도 하지 않았다. 외면은 오래된 먼지처럼 이곳에 쌓여 어둠이 되었다.
옥상 가장자리, 한 사내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민우를 맞았다. 전직 퇴마사, 박도인. 그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 채 그림자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잊는 데 천재야. 보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박도인이 말했다. “그 찌꺼기들이 모이고 응어리져 하나가 됐지. 이 도시는 그걸 ‘무상인’이라 불러.”
무상인(無相人)—살아 있을 때조차 보이지 않았던 자들의 응어리. 분노와 모멸, 무관심이 굳어 탄생한 형상. 그의 얼굴은 없었다. 누구도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도인의 눈이 민우의 검에 잠시 머물렀다. “넌 영혼을 베는 검을 들었고, 또다시 저들에게 살아서 겪은 고통을 죽어서도 겪게 하려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때 발밑의 그림자가 파문처럼 일었다. 옥상 바닥의 균열 사이로 검은 손들이 솟구쳤다. 철거 통지서의 종잇조각과 피 묻은 안전모, 부서진 머그컵과 아이의 이름표가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귓가에 쉰 목소리가 겹쳐들었다.
“죽일 거야… 여기 온 모두 죽일 거야…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껴야 해.”
민우는 그들에게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그냥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상인은 점차 형태를 갖추었다. 서로 포개진 수십, 수백의 얼굴—쓸쓸함, 분노, 체념, 공허—퇴거 당일의 울음과 겨울밤의 떨림이 켜켜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선명하게 물었다.
“넌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왜 우리를 없애려 하지 않는 거야… 지금까지 왔던 많은 무당들은 우리를 없애려고만 했는데, 당신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민우는 숨을 길게 들이켰다. 손아귀의 검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붙였다. 사라진 사람들의 체온이 아직 콘크리트에 남아 있는 듯했다.
“미안하다.”
짧은 사과 뒤에,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덜 아플 줄 알았다. 그건 나의 교만이었고, 나의 두려움이었다.”
박도인이 부적에 불을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받았다. “그를 봐. 끝까지. 괴물로 만들지 말고, 사람으로 봐.”
민우는 두 손을 모아 이내 진언을 올렸다. 허공으로 퍼지는 울림은 칼날이 아닌 마음의 파문이었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
광명이 손끝에서 번져 나가자, 무상인의 몸에서 얼굴들이 하나씩 떨어졌다. 철거 현장의 할머니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고요히 사라지고, 야간 청소노동자의 장갑이 바람에 풀리듯 흩어졌다. 하청 노동자의 피 묻은 작업복, 새벽 배송기사의 손목 보호대, 통역도 변호도 없이 끌려갔던 이주노동자의 눈빛—하나하나가 빛에 닿을 때마다 연기처럼 옅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작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이는 민우를 똑바로 보았다. 두려움보다는 안도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 눈에 어렸다.
“…고맙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아이의 얼굴도 빛 속으로 흩어졌다. 옥상에 맺혔던 냉기가 천천히 풀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도인이 담배를 꺼내 들었으나, 불을 붙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관심 받지 못한 이들을, 죽고 나서야 가끔 말해. ‘비극’이라고. 하지만 관심은 애도가 아니라 책임이야.”
민우는 고개를 떨구었다가 곧바로 일어섰다. 검집에 천우의 검을 조용히 넣으며 답했다.
“앞으로는 검보다 먼저 보겠습니다. 외면의 어둠을, 사람의 얼굴로.”
네온사인이 꺼져 가는 아래 도시에서,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렸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더는 잔혹하지 않았다.